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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여사 별세. 이희호 여사가 남긴 유언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한길을 걸은 여성운동가 이희호 여사의 삶을 돌아보다.

by 보노보TV 2019. 6. 11.

2019년 6월 10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97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생전에 이희호 여사는 자신이 여성운동가·민주화 운동가로 기억되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고 높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남편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기나긴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고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한길을 걸었으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고인을 기리며 여성운동가이자 민주화 운동가 이희호 여사의 삶을 돌아봤습니다.

◎솔선수범형 리더십을 가진 여성.

이희호 여사는 이화여자 고등 보통학교(이화여고 전신)와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에는 반장을 도맡아 하며 솔선수범형 리더십을 보였습니다. 해야 할 일이라는 판단이 서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추진력 있게 진행함으로써 급우들의 신망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1946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교육학과로 전과하여 수학한 후 1950년 교육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대학생 시절 남녀평등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고인은 여학생들의 리더로서 여성의 권리를 찾는 일에 앞장섰고, 탁월한 리더십을 인정받아 사범대 학도호국단 부단장을 맡았습니다.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참여운동에도 관심이 있어서 많은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이와 중에도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대한 여자 청년단과 여성문제연구원 등을 창설해 왕성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서울대학교 졸업 후 감리교 크로 목사의 도움으로 1954년 미국 유학을 하게 됩니다. 1954년부터 4년 동안 램버스대학교에서 사회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스카릿 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당시 미국 감리교회의 장학금을 받았지만 생활비가 부족했던 이희호 여사는 방학 때면 공장에서 일하며 직접 학비를 벌었을 정도로 생활력이 강했다고 합니다.

◎고통을 견디며 남편과 본인의 신념을 지키는 아내.

1951년 부산 피난 시절  이희호 여사가 대한 여자 청년단 총무로 때 해운회사 사장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시 전처를 비운에 잃고 정권에 탄압을 받고 있었으며 선거에서 여러 번 떨어지면서 가산도 탕진한 무일푼의 정치 낭인이었다고 합니다. 집에는 어린 두 아들과 심장병을 앓는 여동생과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 당시 이희호 여사의 주위 사람들과 가족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를 무릅쓰고 이희호 여사는 1962년 5월 41세의 나이로 39세의 정치 낭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결혼하였고 정치인의 아내로서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훗날 이희호 여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결혼 생활중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각지의 유력인사들에게 호소력 짙은 편지를 보내 구명 운동을 펼쳤고 미국 망명 생활에도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80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옥에 투옥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에 이희호 여사는 힘들고 지치는 옥바라지와 석방 운동하게 됩니다. 이처럼 힘든 와중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민주화 투쟁을 중단하고 안전한 길을 찾으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고 강한 투쟁을 하라고 독려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상황이 어느 정도였냐면 큰아들 김홍일 씨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시멘트 바닥에 몸을 던졌다가 영구장애를 얻었다고 합니다. 남편 김대중 대통령은 투옥 중이고 아들은 장애인이 된 상황에서 죽음보다 더한 괴로움 속에 자고 나면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민주주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신념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고 합니다.

◎여성의 인권과 평화 수호하는 운동가.

1997년 12월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1998년 2월 25일부터 2003년 2월 24일까지 청와대에서 영부인으로써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희호 여사의 여성운동에 대한 신념은 대한민국 최초로 행정부에 여성가족부가 설치되고 1998년 가정폭력방지법과 1999년 남녀차별금지법이 잇따라 만들어지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한 2002년 5월에는 여성 최초로 유엔 의장국 총회에 의장으로서 회의를 주재하고 기조연설하면서 역량 있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2009년 9월 이희호 여사는 동역자이자 동지로서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위해 남편이 해오던 일을 이어가는 데 남은 삶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이후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2011년 12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을 때 방북해 조문했고, 2015년 8월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각계 인사들과 함께 다시 평양을 방문하는 등 남북 갈등을 해결하고 평화를 지키려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희호 여사의 마지막 유언

2019년 6월 11일 이 여사가 생전에 변호사가 입회한 가운데 세 아들의 동의를 받아 이 같은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했다며 그 내용을 공개했습니다. 공개된 유언장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본인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준 국민들에 대한 감사 인사, 국민과 평화 통일 기원, 김대중 대통령 관련 기념 사업과 평화센터 사업 방향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유언 내용-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

"우리 국민들께서 남편 김대중 대통령과 저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

"우리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바란다"

"서울 동교동 사저를 '대통령 사저 기념관'(가칭)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노벨평화상 상금은 대통령 기념사업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라"

 "김대중 대통령 기념사업과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위한 김대중평화센터 사업을 잘 이어가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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